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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여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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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25. 20:07 일본문학

羅生門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0879/files/127_15260.html

어느 해 질 녘의 일이었다. 하인 한 명이 라쇼몬羅生門 아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문 아래에는 남자 외에 아무도 없다. 군데군데 붉은 칠이 벗겨진 커다란 둥근 기둥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라쇼몬이 주작대로朱雀大路에 있는 이상 남자 외에도 이치메가사市女笠나 모미에보시揉烏帽子를 쓴 이가 한두 명 있을 법했다. 그러나 남자 외에 아무도 없다.

어찌 된 일인가 하면, 지난 이삼 년 교토에서는 지진, 회오리바람, 화재, 기근 등의 재난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런 까닭에 도성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옛 기록에 의하면 불상과 법기를 때려 부수고, 붉은 칠이나 도금이 되어있는 나무를 길가에 쌓아놓고 땔감으로 팔았다고 한다. 도성이 그 지경이니 라쇼몬의 수리는 말할 것도 없이 내팽개쳐져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다. 그런 황폐를 기회 삼아 사기꾼과 도적이 날뛰었다. 급기야 연고가 없는 시체를 이 문으로 갖고 와 버리고 가는 관습마저 생겼다. 그래서 해가 떨어지면 모두들 께름칙하게 여기고 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까마귀가 어디선가 엄청나게 모여들었다. 낮에 보면 셀 수 없을 만큼의 까마귀가 원을 그리고는, 높은 치미鴟尾 주위를 울며 날아다녔다. 특히 문 위 하늘이 저녁놀로 붉게 될 때면 깨를 뿌린 듯 똑똑히 보였다. 까마귀는 물론 문 위에 있는 시체를 쪼아 먹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무너져 내려 팬 구멍에 잡초가 길게 자란 돌계단 위에 하얀 까마귀 똥이 희끗희끗 달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하인은 칠 층 돌계단 맨 위에서 빛바랜 감색 겹옷을 깔고 앉고는 오른뺨에 생긴 큰 여드름을 의식하며 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필자는 방금 “하인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 썼다. 그러나 하인은 비가 그쳤음에도 특별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당연히 주인집으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하지만 주인집에서 사오일 전 해고되었다. 이전에 쓴 바와 같이 당시 교토의 마을은 이를 데 없이 황폐했다. 지금 이 하인이 오랜 세월 모시던 주인에게서 해고된 일도 사실 이 황폐의 작은 여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인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 하기보다는 “비에 갇힌 하인이 갈 곳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고 하는 편이 적당하겠다. 게다가 오늘 날씨도 이 헤이안平安 시대 하인의 감상주의에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다. 신시申の刻 지나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직까지 그칠 기미가 없다. 한데 하인은 어떻게 해서든 당장 내일 먹을 것을 찾으려고, 말하자면 소용없는 일을 어떻게든 해보고자 끝없는 생각을 계속하며 아까부터 무심결에 주작대로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비는 라쇼몬을 감싸고, 멀리서부터 솨 소리를 모아 온다. 땅거미는 차례대로 하늘을 낮추고 올려보자 비스듬하게 뻗은 기와 앞으로 문 지붕이 어스레한 구름을 묵직하게 떠받치고 있다.

잘 안 되는 일을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수단을 가리고 앉아있다간 담장 아래나 길바닥 위에서 굶어 죽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 문 위로 옮겨져 개처럼 버려지는 것이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다면, 하인의 생각은 몇 번을 심사숙고한 끝에 여기까지 도달했다. 그렇지만 이 “않는다면”은 언제나 “않는다면”에서 멈췄다. 하인은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않는다면”에서 나아가기 위해 당연히 뒤에 따라와야 할 “도적이 되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인은 크게 재채기를 하더니 힘겨운 듯 일어섰다. 밤 추위로 가득한 교토는 화로가 간절할 정도로 쌀쌀했다. 바람은 문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땅거미와 함께 힘껏 가로지른다. 붉게 칠해진 기둥에 앉아 있던 귀뚜라미도 이미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하인은 금빛 땀받이에 덧입은 감색 겹옷 위로 어깨를 펴고 문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바람 걱정 없고 사람 눈에 띄지 않게 하룻밤 편히 잘만한 곳이 있으면 그곳에서 어떻게든 밤을 지새우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다행히도 문 위 누각으로 오르는, 폭이 넓고 붉은 칠이 된 사다리가 눈에 띄었다. 위쪽이라면 사람이라고 해도 시체뿐이다. 하인은 허리에 찬 히지리즈카聖柄 다치太刀가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짚신 신은 발을 사다리 처음 칸에 디뎠다.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라쇼몬 누각 위로 걸쳐진 폭이 넓은 사다리 중간 칸에서 한 남자가 고양이와 같이 몸을 움츠리고 숨을 죽인 채 위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누각 위에서 비치는 불빛이 희미하게 남자의 오른뺨을 적신다. 짧은 수염 사이에 빨간 고름의 여드름이 있는 뺨이었다. 하인은 처음부터 이 위에 있는 건 시체뿐일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다리를 두세 칸 오르고 보니 위에서는 누군가 불을 켜 여기저기 비춰보기까지 하고 있었다. 흐리고 노란빛이 구석구석 거미줄 뒤집어쓴 더그매를 흔들흔들 비추고 있으니 뻔한 일이었다. 밤늦게 비 오는 라쇼몬 위에서 불을 켜고 있으니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다.

하인은 도마뱀붙이와 같이 발소리를 죽인 채 가파른 사다리 맨 위 칸까지 기는 듯 올랐다. 그리고 몸을 죽 펴고 목을 죽 빼 주뼛주뼛 누각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누각 안쪽에는 소문대로 시체 몇 구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지만, 불빛이 미치는 범위가 생각보다 좁아 정확히 몇 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렴풋이 알게 된 건 그중에 알몸인 시체와 옷을 입은 시체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여자와 남자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시체는 모두 예전에 살아있던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처럼 입을 벌리고 손을 뻗은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어깨나 가슴 같이 솟아오른 부분이 흐릿한 불빛을 받아 들어간 부분의 그림자를 한층 더 어둡게 하면서도 모두 벙어리 같이 입 다물고 있었다.

하인은 시체 썩어들어가는 악취에 엉겁결에 코를 막았다. 하지만 그 손은 다음 순간 코를 막는 걸 잊었다. 강렬한 감정이 남자의 후각을 거의 다 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하인의 눈이 처음으로 시체 사이로 웅크린 인간을 봤다. 검붉은 옷을 입고, 키 작고, 마르고, 백발에 원숭이 같은 노파였다. 노파는 오른손에 불을 켠 소나무 조각을 들고 한 시체 얼굴을 들여다보듯 보고 있었다. 머리가 긴 것을 보니 아마 여자 시체일 터였다.

하인은 육 할의 공포와 사 할의 호기심에 이끌려 잠시 호흡마저 잊었다. 옛 기록의 표현을 빌리자면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의 감정이었다. 그러자 노파는 소나무 조각을 마루청 사이에 끼우고 지금까지 바라보던 시체 목에 양손을 얹고는 마치 엄마 원숭이가 새끼 원숭이의 이를 잡는 것처럼 그 긴 머리털을 한 올 한 올 뽑기 시작했다. 머리털이 손을 따라 뽑힌다.

머리털이 한 올 한 올 뽑힐 때마다 하인의 마음에서 공포가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노파를 향한 강렬한 증오가 조금씩 일어났다. 아니, 노파를 향했다고 하면 어폐가 있을지 모른다. 도리어 모든 악을 향한 반감이 점점 강해진 것이다. 이때 누군가가 하인에게 아까 문 아래에서 남자가 생각하던 굶어 죽을 것인가 도적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묻는다면 필시 하인은 아무 미련도 없이 굶어 죽는 쪽을 택하리라. 그렇게 악을 증오하는 남자의 마음은 노파가 꽂아놓은 바닥의 소나무 조각처럼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인은 물론 노파가 왜 시체의 머리털을 뽑는지 알지 못했다. 따라서 합리적인 이유로는 그것을 선악 중 어느 쪽이라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인에게는 비 오는 밤에 라쇼몬 위에서 시체의 머리털을 뽑는다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이었다. 물론 하인은 아까까지 자신이 도적이 될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이미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하인은 양발에 힘을 주고 별안간 사다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히지리즈카 다치에 손을 얹은 채 성큼성큼 노파 앞으로 다가갔다. 노파가 놀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노파는 하인을 척 보고 마치 호랑이라도 만난 듯 펄쩍 뛰었다.

“네 이놈, 어디 가느냐.”

하인은 시체에 발이 걸려가며 황망히 도망치려는 노파를 가로막고 이렇게 꾸짖었다. 노파는 그럼에도 하인을 밀어젖히고 도망치려 한다. 하인은 다시 그걸 가지 못하도록 되민다. 두 사람은 시체 사이로 잠시 아무 말 없이 드잡이했다. 그러나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하인은 마침내 노파의 팔을 쥐고 비틀어 넘어뜨렸다. 마치 닭다리와 같이 뼈와 가죽뿐인 팔이었다.

“뭘 하고 있었느냐. 말해라. 말하지 않으면 이렇게 해주지.”

하인은 노파를 떠밀고 느닷없이 다치 칼집을 벗기더니 하얀 강철 빛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래도 노파는 입을 다문다. 양손을 부들부들 떨고 후들거리는 어깨로 숨을 헐떡이면서 안구가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도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다. 그걸 본 하인은 처음으로 이 노파의 생사가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는 사실을 명백히 의식했다. 그리고 그런 의식은 지금까지 세차게 타오르던 증오의 마음을 어느샌가 식히고 말았다. 뒤에 남은 건 그저 일을 원만하게 성취했을 때의 편안한 충실감과 만족뿐이었다. 그래서 하인은 노파를 내려다보며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게비이시検非違使 관리 같은 게 아니다. 지금 막 이 문 아래를 지나던 나그네니라. 그러니 오라를 받으라는 게 아니야. 너는 그저 지금 이 순간 이 문 위에서 무엇을 하던 참이었는가, 그것만 말하면 된다.”

그러자 노파는 크게 뜬 눈을 더 크게 하며 가만히 하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빨간 눈꺼풀의 맹금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주름으로 거의 코와 하나가 된 입술로 무언가를 씹는 듯이 움직였다. 가는 목에서 뾰족한 울대뼈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그때 그 목구멍에서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이 헐떡이는 소리가 하인의 귀로 전해져 왔다.

“이 머리털을 뽑아서는, 이 머리털을 뽑아서는, 가발을 만들려고 했네.”

하인은 노파의 대답이 예상 외로 평범해 실망했다. 그리고 실망과 동시에 다시 이전의 증오가 차가운 모멸감과 함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 기색이 상대편에 전해진 것일까. 노파는 한 손에 시체 머리에서 뽑은 긴 머리털을 든 채 두꺼비가 웅얼대는 것 같은 목소리로 우물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게 말이지, 시체 머리털 뽑는 게 누군가에겐 나쁜 짓일지도 모르오. 하지만 여기 있는 시체들은 모두 그런 짓을 당해도 쌀 인간뿐이라네. 내가 방금 머리털을 뽑은 여자는 말이야, 사 촌四寸 정도씩 잘라 말린 뱀을 건어干魚라고 하고 다테와키의 진太刀帯の陣으로 팔러 다녔지. 역병에 걸려 죽지 않았다면 지금도 팔러 다녔을 거네. 그래도 이 여자가 파는 건어는 맛이 좋다고 해서 다테와키 놈들이 빼놓지 않고 부식으로 샀던 것 같지만. 나는 이 여자가 한 일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네.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을 판인데, 어쩔 수 없었겠지. 그렇다면 내가 하던 일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 짓이라도 안 하면 굶어 죽는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 말일세. 그리 어쩔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이 여자라면 아마 내가 한 일을 너그러이 봐주지 않겠는가.”

노파는 대략 이런 의미의 말을 했다.

하인은 다치를 칼집에 넣고 칼자루를 왼손으로 덮은 채 냉담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오른손으로는 뺨에 난 빨간 고름의 큰 여드름을 신경 쓰며 듣고 있었다. 그런데 듣는 동안에 하인의 마음속에는 어떤 용기가 솟아올랐다. 그건 아까 문에서 이 남자에게 없었던 용기였다. 그리고 다시 아까 이 문 위로 올라와 노파를 붙잡은 때의 용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려는 용기였다. 하인은 굶어 죽을지 도적이 될지를 망설이지 않은 것만이 아니다. 그때 이 남자의 마음가짐은 굶어 죽는 것 따위는 거의 생각할 수 없을 정도 무의식적으로 몰려 있었다.

“분명 그러한가.”

노파의 이야기가 끝나자 하인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다짐했다. 그리고 한 발짝 앞으로 나가 별안간 오른손을 여드름에서 떼더니 노파의 목덜미를 잡아채며 물어뜯는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강도질을 해도 억울할 게 없겠군. 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몸이니.”

하인은 재빠르게 노파의 옷을 벗겨 냈다. 그러고 나서 발에 매달리려는 노파를 거칠게 시체 위로 걷어찼다. 사다리가 있는 입구까지는 다섯 걸음이 채 안 된다. 하인은 벗겨 낸 검붉은 옷을 겨드랑이에 끼고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을 향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잠시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노파가 시체 사이에서 알몸을 일으킨 건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노파는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신음하며 아직 타오르는 불빛에 의지해 사다리가 있는 곳까지 기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짧은 백발을 젖히고 문 아래를 내다보았다. 밖은 그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다.

하인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다이쇼 4년 9월)

posted by 일각여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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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21. 15:24 일본문학

女類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0035/files/274_20183.html

저(26세)는 여자를 한 명 죽인 적이 있습니다. 실은 어이없이 죽여버렸습니다.

종전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패전 전에는 징병으로 이즈(伊豆)의 오시마(大島)에 끌려가서 매일매일 땅굴공사를 강제로 하게 되어, 원래부터 이렇게 삐쩍 마른 몸이라, 정말이지 지금도 죽고 싶을 정도로 고생했습니다. 종전이 되고는 뭐가 뭔지 그저 기진맥진해 과장하자면 거의 기듯이 도치기 현(栃木県)에 있는 생가에 도착해 그로부터 삼 개월간이나 부모 품에서 그저 멍하니 폐인 같은 생활을 하다가, 머지않아 학생 시절부터 알던 문학 친구인 도쿄의 야나기타(柳田)란 꽤 야무지고 약삭빠른 인물이, “돈은 있어. 신잡지를 발행할 생각이야. 너도 도와.” 하는 뜻을 속달로 부쳐서 저도 뭔가 번뜩 눈이 뜨이는 느낌이 들어, 서둘러 상경해 이“신현실”이라는 문예잡지의, 음, 편집부 차장이라고 하는 직함으로 삼 년이나 마치 반 미친 사람처럼 전후 저널리즘에 시달리며 살아왔습니다.

그 종전 직후에 제가 도치기에 있는 생가에서 도쿄로 나왔을 때에는 도쿄의 정경, 보는 것, 듣는 것 전부 슬픈 것들뿐이었습니다만, 적어도 저 개인에게는 통쾌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묘한 기쁨을 느낀 일은 시장에 물자가 잔뜩 나오고, 또 먹고 마시는 포장마차, 작은 음식점이 거리 곳곳에 시끌벅적하게 넘치도록 늘어서서 이상하게 활기를 띠었습니다. 애초에 저에게는 시장에 상품이 산처럼 쌓여있어도 그걸 구매할 능력이 없어 그저 구경할 뿐이었지만 그것도 뭔가 신이 나는 기분이 들었고, 또 가끔 친구들과 포장마차의 노렌(暖簾)에 고개를 들이밀어 꼬치구이를 뜯거나, 소주를 마시거나, 큰 소리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논하거나 하면 확실히 해방된 자유를 누린다는 실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신바시(新橋)의 어느 포장마차 여주인이 저에게 반했습니다. 아니, 웃지 말아주세요. 정말 반했습니다. 여기가 중요한 부분이니까 저도 쑥스러워 하지 않고 말한 겁니다. 말씀 드리는 게 늦었지만, 당시의 제 생활은 도쿄역 야에스구치(八重洲口) 부근에서 불에 탄 건물을 아파트 풍으로 개조한 이 층 단칸방에서 살아, 종전 후 첫 겨울의 찬바람은 그 귀신 집 같은 아파트 복도에 이상한 소리를 울리며 미친 듯이 불어댔는데, 오늘 밤도 또 저곳에 들어가 자야 하나 생각하면 허전해서 점점 소주 마시고 들어가는 횟수가 빈번해진데다, 친구나 작가와의 교제 등으로 남 못지않은 술꾼이 되었습니다. 긴자(銀座)에 있는 잡지사에서 일본교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갈 때면, 기차나 도보 어느 쪽이든 신바시에서 마시는 게 제일 편하니까 대체로 신바시 근처 포장마차에 들르곤 했습니다.

언제인가 야나기타란, 예의 야무지고, 스스로 자기 표정은 거울을 보지 않고도 늘 적확히 감지할 수 있다고 자랑하던 친구 겸 편집부장에게 이끌려서 신바시 바로 근처 강가에 서 있는 오뎅 집에 마시러 갔습니다. 그곳 또한 틀림없이 포장마차였습니다만 안이 깊어 토방에 걸상 몇 개가 늘어져 있는 까닭에 “순서대로 채워”앉으면 손님 열 명은 넉넉히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 포장마차에 간 건 그날 밤이 처음이었습니다만 그 가게는 인근의 신문기자나 잡지기자, 작가, 만화가들의 사교장 같은 곳이어서, 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이른바 그날그날의 "핫뉴스"를 교환하며 웃고 떠드는 곳이었습니다. 가게 이름이랄 것도 변변히 없어, 도요 공(公)이나 도요 짱 같이 그 가게 영감의 애칭 같은 게 이름이었습니다. 도요 공은 사십 가깝게 먹은 땅딸보에, 이마가 좁은 중대가리로, 눈이 나쁜 듯 항상 눈가가 빨갛게 슴벅거렸지만 위압감 있는 멋진 남자였습니다. 여주인은 처음 저에게는 삼십 넘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저와 동갑이었습니다. 원래 늙어 보이는 편이었습니다. 마르고 작은 몸집에 거무스름하게 빈틈없는 얼굴이었는데 말이 없는데다 그다지 웃지 않는, 수수하고 쓸쓸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 음악가지요?”

내가 소주를 마시는 손놀림을 얼핏 보고, 여주인은 그렇게 한마디 했습니다. 왔군!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용모가 떨어지는 여자는, 누군가 머리카락을 칭찬하면 자주, 체호프의 연극에도 나옵니다만, 저는 이렇게 말라깽이인데다 얼굴색도 검푸른 빛이라 용모나 풍채에 괜찮은 구석이 없는 것은, 저도 싫을 정도 그야말로 적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 양손의 손가락은 묘하게 갸름하고 손톱도 발그스름해, 다른 곳은 칭찬할 데가 전혀 없어서 그런지, 지금까지 종종 여자들이 칭찬하며 악수를 청해온 적도 있습니다.

“왜?”

저는 알면서 미심쩍은 듯 물었습니다.

“예쁜 손. 피아노 치죠?”

역시 그랬습니다.

“뭐, 피아노?”

하고 아까 말한 야무진 친구가 야단법석을 떨면서,

“피아노 청소도 못할걸. 그 녀석 손은 그냥 마른 것뿐이야. 마른 남자가 음악가라면, 간디 옹은 오케스트라 지휘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되지.”

옆에 있던 손님도 웃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날 밤 여주인한테 들은 진심 어린 칭찬 한마디를 이상하게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여자 여럿한테서 칭찬을 듣고 또 악수까지 청해온 적까지 있었지만 그건 전부 그 자리의 그 순간만의 농담으로, 저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만, 그 도요 공 여주인의 무심한 빈말만은 묘하게 마음에 스며들었습니다. 여자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남자란 동물은 여자가 묘하게 진심 어린 한마디로 빈말을 하면 저처럼 못생긴 남자도 갑자기 어디선가 자신감이 솟아오른 나머지 여자에게 꼴불견일 정도로 뻔뻔스럽게 굴다가 남자도 여자도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게 세간에서 자주 눈에 띄는 비극의 경위라고 봅니다. 여자는 좀처럼 남자에게 빈말 같은 걸 하면 안 되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우리의 경우 단 한 마디에서 시작된 손가락에 대한 빈말이 점점 비극으로 돌입했습니다. 사실 자부심이 없으면 연애든 뭐든 이뤄질 수 없습니다만, 저는 그때부터 매일 밤처럼 도요 공에 다니며, 낮에는 여주인과 함께 긴자를 걷기도 하고 그러다가 이제는 자부심이 늘어나기만 해, 주위에서 보면 한심한 말이나 늑대가 침을 흘리며 날뛰는 것처럼 불쾌할 뿐이었겠지요. 그러다 저는 어느 날 밤 도요 공에서 주정뱅이 작가인 가사이 겐이치로(笠井健一郎) 씨한테 욕을 먹었습니다.

가사이 씨는 제 고향 선배로, 죽은 형과 대학에서 동급생이었다고 하는데, 그 관계도 있어서 가사이 씨와 저는 그저 작가와 편집자 사이 이상 친하게 지내, 잡지에 가사이 씨의 원고를 받는 건 오로지 제 담당으로, 또 가사이 씨도 제 원고 의뢰는 비교적 기분 좋게 들어주었습니다.

그 가사이 씨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신바시에 있는 오뎅 집 도요 공에 들어왔을 때는 흠칫했습니다. 가사이 씨는 댁이 신주쿠(新宿) 근처라 그쪽으로는 매일 밤처럼 마시러 돌아다녔지만, 신바시 쪽까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날 밤은 무슨 모임에서 돌아가는 중인 듯 와후쿠(和服)에 하카마(袴)를 입고 있었습니다. 벌써 꽤 마신 듯 휘청휘청 제 옆으로 와 앉더니,

“들었어. 바보 자식이야, 넌.”

진심으로 화가 난 얼굴이었습니다.

“그거냐? 저 여자가, 그런 거야?”

오뎅을 삶는 여주인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하나도, 안 좋잖아. 이걸로 너란 남자도 끝이야. 원래, 자네, 남편 있는 여자하고, ……”

“그건,”

하고 도요 공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이미 저희는 이혼했습니다. 저희는 성격이 안 맞습니다.”

하고 침착하게 말하고 가사이 씨 컵에 찰랑찰랑 소주를 붓습니다.

“아니, 그건 자네 부부의 일은 자네 부부가 아니면 모르지. 내가 알 바가 아니야. 애초에, 관심 없어. 또 이토(伊藤)(내 이름)의 연애가 어떤 식으로 진전되는가도 전혀 알고 싶지 않아. 음, 이 소주는 꽤 괜찮군. 자네, 자네, 한 잔 더 주게. 그리고 물도 주게. 이봐, 여주인 씨. 여기도 뭔가 먹을 걸 가져다주게. 그래도 나는 조금도 다른 부부의 이합집산이나 연애의 자초지종 따위에 무례하기 짝이 없게 흥미를 느낄 만큼 그렇게 품위 없는 남자만은 되지 않을 작정이다. 사실 아무 관심도 없어.”

가사이 씨는 이미 만취에 가깝게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큰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해대고 있어, 다른 손님도 흥이 식은 얼굴로 턱을 괴거나 하며 멍하니 가사이 씨의 난폭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단지 이 이토를 향해 한 마디 말해두고 싶은 게 있네. 그걸 위해 오늘 밤 여기까지 들르게 된 거라고. 이봐, 이토 군. 자네와는 절교야. 하지만 이건 나의 의지가 아니네. 자네는 이 연애가 진전되면서 나를 찾아오지 않게 되겠지. 말하자면 서로 겸연쩍게 서먹서먹해져 자네는 나를 경원시하고 내 의지와 관계 없이도 자연히 절교하는 형태가 되겠지. 말하고 싶은 건 그것뿐이네. 그럼 실례하겠네. 멍청한 자식!”

휘청휘청대며 일어선 때,

“저기, 실례입니다만,”

하고 명함을 한 손에 든 채 가사이 씨에게 다가간 사람은 예의 야무진 신사, 야나기타였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만, 저희 이토 군이 지금까지 이런저런 신세를 져 한 번 저도 인사를 드리러 가려고 했었는데, ……그게…….”

가사이 씨는 야나기타에게서 명함을 받아 들고, 근시인 듯 눈에서 오 촌 정도 거리에 가져다 읽더니,

“그럼, 자네가 편집부장인가. 말하자면, 이토의 형뻘이란 말이군. 나는 자네가 부럽네. 왜, 이렇게 되기 전에 자네는 이토에게 충고하지 않은 건가. 돌팔이 부장이야, 넌. 도리어 이토를 부추긴 게 아닌가. 전혀, 그 빨강 넥타이가 맘에 들지 않는군.”

하지만 야나기타는 태연하게 웃으며,

“넥타이는 바로 바꾸겠습니다. 저도 이건 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별로다. 그걸 알면서 왜 이토한테 충고하지 않았던 건가. 충고를.”

“아니, 넥타이 말입니다.”

“넥타이 따위, 어찌되든 알 바 아니야. 네 옷차림이 어떻든 관심 없어. 문제는 내가 이토와 절교하는 일뿐이라고. 그것뿐이야. 그리고 더는 할 말은 없어. 실례하지. 모두 멍청이들뿐이다.”

내뱉듯이 말하고 셈도 치르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포장마차에서 나갔습니다. 야무진 야나기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고 쓴웃음 지으며,

“주정에는 당할 수 없군. 완력도 셀 것 같고 말이지. 형편이 안 좋군. 어쨌든, 이토. 선생님 뒤를 쫓아가서 사과하고 와주게. 나도 이번 자네의 연애는 조마조마했었는데, 뭐,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저놈이야말로 바보 같은 벽창호라 저렇게 앞으로 우리 잡지에 쓰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 당할 수 없지. 가주게. 가서 그리고 음, 적당히 얼버무리고 사과하게나. 선생님 말씀 듣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하면서 말이지.”

저는 바로 가사이 씨를 쫓아 포장마차에서 나와, 그때, 돌아서 힐끗 도요 공의 여주인을 보니, 여주인도 얼굴을 숙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집까지 모시겠습니다.”

신바시 역에서 따라잡아 그렇게 말하자,

“왔는가.”

하고 예견하고 있었다는 말투로,

“한 잔 더, 마시자고.”

눈이 팔랑팔랑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를 잡아. 자동차를.”

“어디로?”

“신주쿠다.”

자동차 안에서 가사이 씨는,

“한 잔 마시고 휘청휘청. 두 잔 마시고 흔들흔들. 휘청휘청 흔들흔들.”

하고 염불 같은 절(節)을 낮게 거듭거듭 외더니, 그렇게 거의 자는 듯이 보였습니다.

저는 화도 치밀고 불안한데다 슬퍼서 외투 주머니에서 꽁초를 더듬어 꺼내, 추위로 곱은 그 문제의 갸름한 손가락으로 집어 라이터 불을 붙이고, 창밖의 어둠 속에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를 봤습니다.

“이토는 올해 몇 살이나 됐는가?”

아주 푹 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니슈마와시(二重回し)[각주:1] 옷깃에 얼굴을 묻은 채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자신의 나이를 알렸습니다.

“젊군. 놀랐어. 그럼 뭐 무리도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는 조심하게. 나는 그 여자가 특별히 나쁘다고 하는 게 전혀 아니야. 그 사람 일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네.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아. 아니, 설령 안다고 해도 나한테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은 없어. 나는 제삼자야. 전혀 아무런 관심도 없지. 그렇지만 왠지 너에게는 애석한 마음이 드는 거네. 애석해. 좋아하는 걸로 스스로 지옥행을 지원할 필요는 없다고 봐. 지금 자네의 기분 같은 건, 나도 알고 있어. 그거야 너와 비교하면 백 배 이상의 여자가 반했으니 말이지. 정말이라네. 하지만 어느 때고 지옥 같은 기억이었지. 모르겠네, 여자의 마음이. 잘 모르겠는 거야. 나는 말이지, 인류, 원류(猿類) 따위의 동물학상의 구별은 틀렸다고 생각하네. 남류(男類), 여류(女類), 원류(猿類)라고 해야지. 종족이 완전히 다른 거야. 몸 구조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고방식도, 대화의 의미도, 냄새, 소리, 풍경에 대해 반응하는 법도 통 다르지. 여자 몸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절대로 남류는 이해하지 못할 불가사의한 세계에 여자라는 동물은 태연히 살고 있어. 자네, 한 번 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네. 역 플랫폼에 서서 멀찍이 풍경을 바라보고 다시 살짝 이삼 촌(寸) 허리를 굽혀 한 번 더 바라보면 그 전방의 똑같은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보여. 이삼 촌 키가 크냐 작냐에 따라 그만큼 인생관, 세계관이 달라지는 걸세. 하물며 자네, 남자 몸과 여자 몸의 그 엄청난 차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별세계에 사는 거야. 우리에게는 파랗게 보이는 것이, 여자한테는 빨갛게 보일지도 몰라. 그렇게 빨간색을 파란색이라고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그렇게 말하니 우리 남류는 여류와 서로 이해한다고 쉽게 우쭐거리곤 하지만 터무니없는 지레짐작인지도 모르지. 우리가 소주를 한 되 마시고 흔들흔들하는, 딱 그 정도 기분으로 이 여류라고 하는 생물은 진지한 표정으로 장을 보든 뭘 하고는 또 남류를 비평하지 않을까 싶네. 소주 한 되, 분명히 그 정도야. 맨정신으로 인사불성으로 그렇게 옆집 부인과 우물가에서 세상 이야기를 하니 말이지. 실로 불가사의해. 분명히 여류들끼리의 대화에는 우리 남류에게 도저히 알 수 없는, 아주 다른 의미가 담겨있어. 우리 남류가 들으면 대충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여류끼리의 대화이니 말이지. 인사불성은커녕, 마치 발광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실로 수수께끼야!”

이 가사이 겐이치로라는 작가는 젊었을 무렵 애인에게 꼴사나운 모습으로 차여 그 타격이, 그야말로 미간에 깊은 상처가 될 정도로 강한 듯, 그 이후 새장가도 들지 않고, 술만 마시며 여자를 아예 신용하지 않고, 한결같이 여자를 비웃는 듯한 소설만 써서, 그래도 독서계 일부에서는 가사이 씨의 그런 십 년이 하루 같은 독설을 꽤 통쾌하게 여겨 가사이 씨도 신명이 나, 지금에는 가사이 씨의 여자에 대한 욕설은 말하자면 그의 장기같이 되어 있었다.

“응? 알겠나? 여류와 남류가 이해한다는 건, 그건, 무리라는 말이지. 그런 어설픈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나는 여기서 예언해도 좋아. 자네는 그 여자한테 배신당할 거네. 틀림없이 배신당해. 아니, 그 여자 하나만 말하는 게 아니야. 그 한 명의 개인적인 사정 따위 난 모르네. 나는 그저 동물학 쪽에서 보는 여류의 일반적인 개론을 기술한 것뿐이야. 여류는 돈을 좋아하니까 말이지. 죽은 이의 이마에 세모난 종이가 있어, 거기에 “사”란 글자가 쓰여 있는 것처럼 여류의 이마에는 예외 없이, “돈”이란 글자가 쓰인 세모난 종이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걸세.”

“죽는다고 하네요. 헤어지면, 살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뭔지 몰라도 약을 갖고 다닙니다. 그걸 먹고 죽는 다네요. 태어나서 첫사랑이라고 합니다.”

“넌 머리가 이상해 진 게 아닌가, 멍청한 놈.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멍청한 놈. 나는 단념했다. 여기는, 어디냐. 요쓰야(四谷)인가. 요쓰야에서 돌아가라, 멍청한 놈. 잘도 내 앞에서 그런 어이없는 말을 뻔뻔스럽게도 하는구나. 지금 죽는 건, 너겠지. 여자가, 흠, 무슨 말을 하든, 결국은 돈이야. 기사 양반, 요쓰야에서 바보가 한 명 내리오.”

여자 마음은 공연히 시험해 볼 게 아닙니다. 저는 가사이 씨한테 하도 거칠 게 매도당해서 분한 마음에 그 울분을 애인에게 풀어, 그 다음 날, 여주인이 회사로 주뼛주뼛 찾아오자 냉담하게, 전날 밤의 굴욕을 숨김없이, 약간의 과장도 없이 들려주고는 나도 남자로서 그렇게 욕을 먹었으니 이제 더 고집을 피운들 나는 너와 헤어져서 저 주정뱅이 가사이 씨를 다시 보게 해야 한다, 하고 실은, 헤어질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는데, 한 편으로는 또, 이참에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그럴듯하게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그날 밤 자살했습니다. 약을 먹고 수로에 몸을 던졌습니다. 뒤처리는 도요 공이 싫은 표정 하나 없이 공손하게 해줬습니다. 그 이래로 나와 도요 공은 애처로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여주인의 자살로부터 한 달쯤 지났을 초봄의 어느 날 저녁, 가사이 씨는 그날 밤 이래 처음으로 도요 공의 포장마차에 언제나처럼 만취한 채 나타났습니다.

“내가 저번 달 이 가게에서 계산을 했는지, 안 했는지, ……”

그다지 기운이 없는 말투였습니다.

“계산은 필요 없습니다. 나가 주시죠.”

하고 도요 공은 평소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말했습니다.

“뭐야, 화내고 있네. 남류, 여류, 원류가 신경 쓰였나 봐? 그렇지만 정말이라면 어쩔 수 없지.”

찰싹하고 시원한 소리가 났습니다. 도요 공이 가사이 씨의 뺨을 친 겁니다. 이어서 제가 발로 차 쓰러뜨렸습니다. 가사이 씨는 네발로 기며,

“멍청한 놈, 폭력은 쓰지 마. 남류, 여류, 원류, 틀림없이 옳아. 틀리지 않았어.”

이미 반쯤 자는 만큼 취해 있었습니다. 반항하지 않는 것을 보고 예의 야무진 신사, 야나기타가 딱하고 가사이 씨의 머리를 치며,

“눈을 떠. 이 동물박사야. 네발로 기어나가라.”

하고 말하고, 또 딱 가사이 씨의 머리를 때렸지만 가사이 씨는 아무런 저항도 않은 채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남류, 여류, 원류, 아니, 여류, 남류, 원류의 순인가. 아니, 원류, 남류, 여류일까? 아니, 아니. 원류, 여류, 남류의 순인가. 아, 아프군. 폭력은 안 돼. 원류, 여류, 남류인가. 부조금 천 엔 여기 두고 가네.”


  1. 인버네스를 일본풍으로 바꾼 옷 [본문으로]
posted by 일각여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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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19. 19:47 일본문학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1308/files/49298_34002.html

작가소개 : http://blog.naver.com/japanliter/140027128269

"저기, 당신. 지금 오쿠(尾久)에 있는 집(친척)이라도 가 있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마누라인 오하쓰(お初)가 리헤이(利平)의 머리맡에서 끊임없이 설득한다. 리헤이가 쟁의단에서 머리를 깨지고 왔을 때부터 오하쓰는 아주 겁을 먹었다.

"무슨……말도 안 되는……도망치다니, 그런……앗, 아, 아."

눈을 돌려 마누라에게 호통을 치려고 했지만 맞아 붕대 감은 머리의 상처가 따끔따금 죄여 온다.

"그렇지만, 당신……"

오하쓰는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당신, 또 오늘 아침 쟁의단에 어디선가 이상한 놈들이 잔뜩 왔으니……. 그런 위험한 놈들이니 정말 당신 목숨이라도 빼앗을 지도 몰라……. 어머, 봐, 저렇게 많이 시끌시끌하는 거, 안 들려?"

안 들리기는 커녕, 리헤이의 온 신경은 담 하나만 사이에 둔 옆 쟁의단 본부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소리에 기상대의 풍향계 화살처럼 쏠려 있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그래도 직장(職長)이라고, 회사의 신임을 짊어지고 또 한 편으로는 놈들의 신뢰를 짊어지고 수백 명의 머리 위에 서 있는 거다……. 저런 은혜도 모르고 의리도 모르는 놈들한테 겁먹어서 살림을 정리하고 도망치라니, 그런 모욕적인 일이 있을까.

"시끄러워……. 저런 놈들은 파업으로 밥먹고 다니는 깡패들이야. 뭘 할 수 있다고……. 시끄러우니까 아래 내려가 있어, 내려가 있으라니까……."

오하쓰는 어쩔 수 없이 아기를 안아 일어섰지만, 불안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나는 물론이고, 애들도 위험해서 밖에도 못 나가고 아무것도 못 해."

입 속으로 중얼중얼거린다.

"이봐, 밑에 있는 경찰한테 가와무라(川村) 잡혔냐고 물어보고 와."

흥분하자 머리의 상처가 한층 아파 온다. 병원에도 안 가, 칭칭 감은 붕대로 피가 번져 나오는데 검은 담 너머 바깥의 빛이 비춰 눈구석이 몹시 가물가물한다. 은혜도 모르는 가와무라 이 개자식! 어릴 적부터 키워준 은혜도 잊어버리고 내 머리를 깨다니……. 감방 들어가서 울지나 마라…….

뒤로 젖혀 반자널을 보며 욱신욱신 쑤시는 아픔을 꾹 눌러 참았다.

회사가 직장폐쇄를 한 이래, 벌써 이럭저럭 사십 일이다. 인쇄기에 녹이 슬 것 같은 회사 내부에 있는 리헤이와 동료들은 직장 단체를 만들어 처음에는 이 쟁의에 "공평한 중립"을 지킨다는 성명을 냈다. 다만 그걸 신용한 쟁의단원은 한 명도 없었지만……. 하지만 이제 오늘에는 리헤이와 그의 동료들이 사장의 유일한 손발이자 버팀목이었다. 회사의 흥망은 곧 자신의 흥망이라 생각해왔다. 그들은 쟁의단원 중 온건파 단원들을 알았다. 또 이런저런 단원들의 약점도 알았다. 그게 가장 먼저 시행되었는데, "분열시키기" "의리와 인정만으로 유괴"였다. 하지만 그걸로도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탈자 공략에 나섰지만 그것도 강고한 쟁의단의 방해로 예상만큼의 성공은 이루지 못했다. 트럭 안 짐 사이로 다섯 여섯 명의 이탈자를 싣고 회사 바로 근처까지 왔을 때, 트럭 운전수와 변장한 리헤이가 심하게 얻어맞은 때도 이때였다.

그래도 직장(職長) 동료의 혈연관계나, 이를테면 리헤이처럼 부자가 같이 근무하는 자는 아들을 회사로 보내 간신히 이백 명이 안 되는 이탈자로 한편으로 쟁의단을 위협하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기계에 녹이 슬지 않을 정도로 공회전을 시키고 있었다.

"자네, 회사 안에서 생활하는 게 좋겠네. 쟁의단 본부에 붙어있는 집이라니, 위험해서 살 수가 있나."

동료도 끊임없이 리헤이를 설득했지만, 고집 센 그는 듣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적 우세를 등에 업고 그때 날뛰는 혈기다.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겠다고 생각한 그였다. 형사나 정복 경찰이 지켜줘 회사에서 2정(丁)도 떨어져 있지 않은 자신의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친 몸으로 이 층에 드러눕고 나서 벌써 오육 일 지난 아침의 일이다.

오하쓰가 올라 왔다.

"잡혔대요, 가와무라가"

"언제야, 어제래?"

"어젯밤이라네요. 그 꼴을 보라지. 젠장, 은혜도 모르는 놈이 어젯밤에 심한 꼴을 당했다지 뭐예요."

"흐음"

리헤이는 머리의 통증이 훨씬 줄어든 것처럼 순간 느껴졌다. 사회주의자 같이 긴 머리카락과 영리해 보이는 작지만 맑은 눈을 한 가와무라가 갑자기 작디 작고 불쌍하게 여겨졌다. 열두세 살 어릴 적부터 혼나고 두드려 맞으며 자신에게 일을 배웠던 그 가와무라의 얼굴이 생생히 눈에 떠올랐다.

그저께 밤에도 이삼십 명 검거되고, 그 바로 십 일 전에도 사오십 명 검거된 쟁의단이다. 아무리 삼천 명으로 시작한 쟁의단이라 해도 직장(職長)들이 생각하기에 그 승패는 불보듯 뻔했다.

"쟁의가 끝나면 내가 데리러 가지."

그러면 그놈들이 어떤 얼굴을 할까.

그는 왠지 눈앞이 갑자기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심복이자 내제자[각주:1]라고 할 부하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등을 돌렸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한 일이었다. 가와무라도, 다카하시(高橋)도, 사이토(斎藤)도 오노(小野)도, 그외 십수 명 그를 지지하는 유력한 부하는 모두 조합의 손에 빼앗겨 버렸다.

그럼에도 일체의 원한을 없던 일로 하고 쟁의 중에 스스로 데리러 가는 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가져올까.

아직 조합같은 게 없을 무렵, 귀여운 부하들 가운데서 높이 앉아 축배를 들던 당시의 일이 떠올랐다.

"그렇게, 심한 꼴을 당했대?"

리헤이는 이불 위로 살살 일어났다.

"그렇대"

마누라는 조금 의아스러운 듯이 리헤이의 얼굴을 봤다.

"신경 쓸 거 없잖수, 그런 은혜도 모르는 놈들."

"음, 그건 그렇다만."

그는, 마누라의 손을 뿌리치고 기어온 다섯째 여자아이를 한손으로 어르며 창문 장지 사이로 검은 담을 보았다.

마침 그때…… 담 너머 쟁의단 본부에서,

"만-세, 만-세"

하고 소리 높여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오십 명, 백 명의 목소리다.

"뭘까?"

부부는 눈을 마주 봤다.

"어디……"

오하쓰가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조심 장지를 열어 담 너머를 엿보더니 그대로 숨을 죽였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래도 오하쓰는 입을 다문다.

리헤이는 아픔을 잊고 아기를 안은 채 오하쓰의 등뒤에 섰다.

그러자 본부 뒤 툇마루에서 마루 밑 토방까지 가득 쟁의단원이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게 정면으로 보였다.

마루 위 젊은 남자 이삼십 명은 마침 한중(寒中)인데도 굴하지 않고 노동복을 휙휙 벗어던진 알몸이었다.

"팬티도 벗어버려, 참을 수가 없네."

하고 말하며 새빨갛게 될 정도로 온몸을 긁어대는 남자도 있었다.

"어머, 저 많은 이 좀 봐."

붉은 어깨띠를 두른 여공들은 바지런하게 벗어던지는 노동복을 따끈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통에 집어넣는다.

"이봐, 그만 해. 여자 앞에서 그렇게 벗어대지 말라고."

"그만 하라니……. 너희들, 여자는 잠깐 딴데 봐주지 않을래."

"아하하하하"

"오호호호"

남자도 여자도 와 폭소를 터뜨렸다.

"왜 그러는데, 뭐야?"

오하쓰는 리헤이에게 살짝 말한다. 리헤이는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저건 오늘 아침 유치장에서 방면되어 돌아온 쟁의단원을 다른 자들이 환영하는 자리다!!

리헤이는 놀랐다. 어두운 곳에 수십 일 처박혀 있어야 할 그들의 얼굴 어디에 근심의 빛이 있는가. 흔연한 게 마치 개선 장군이 아닌가! ……마중하는 자도 돌아오는 자도 그런 유쾌한 폭소는 어디서 나오는 거냐!!

따뜻한 겨울의 아침 햇살에 비친 젊은이 사이에서 움직이던 누군가 리헤이를 공격했다. 마루 끝에 즐비하게 늘어선 십수 명의 나신 중 한 명이 낮게 노래를 시작하자 다른 이들이 높게 응하여, 의기왕성한 힘의 혁명가가 크게 파문을 일으켜 얼어붙은 아침 공기를 찢으며 높이 뛰어올라 퍼져 간다.

……민중의 기, 붉은 기는……

남자 한 명은 날아오를 듯한 자세로 손을 흔든다……. 그러자, 오하쓰가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

"앗, 리스케(利助)가, 당신 리스케가!"

오하쓰는 리헤이의 팔을 힘껏 당겼다.

"뭐, 리스케?"

세상에!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바로 눈앞에서 목이 터져라 높이 노래하는 나신 사이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리스케가 있었다!

리헤이는 망연해졌다.

그럴 리가 없어……. 확실히 회사 안으로 트럭에 태워 보냈을 리스케였는데……. 하지만 틀림없이 리스케는 알몸으로 혁명가를 부르고 있었다.

"여러분, 옷을 입어주세요. 밥 다 됐어요."

여공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여공이 제각기 밥통을 옮긴다. 구운 꽁치가 접시 위에서 뒤집혀 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리헤이는 반쯤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리스케, 리스케" 마누라는 담 너머로 부르려 했다.

"그, 그만, 조용해."

리헤이는 마누라 입에 손을 대고 조용히 시켰다.

"자, 들어가자. 문 닫아."

리헤이는 문에 손을 댄 순간, 문득 한 번 더 리스케쪽을 봤다.

그때, 알았는지 몰랐는지 리스케는 옷을 입으며 이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가만히 리헤이의 얼굴을 봤다……고 생각했다, 그 눈, 그 눈…….

리헤이는 서둘러 장지를 닫아 걸었다.

"저 눈이야, 저 눈. 가와무라도 저 눈이야!"

리헤이는 머리를 싸매고 입을 다물었다.

쟁의 이전부터 조합 일이라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뛰쳐나갔던 리스케였다. 리헤이가 말하는 대로 고분고분 회사로 돌아간 일도 지금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긴 이상했다.

"이래선 마치 부모고 자식이고, 의리고 인정이고 없잖나."

리헤이는 목이 멜 듯 했다. 그리고 열이 난 탓인가 오싹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는 침구를 머리까지 푹 뒤집어 쓰고 눈을 감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휘저었다.

그때도…….

이탈자 네다섯 명을 데리고 ××마을 파출소 옆에 트럭을 세우고 다른 한 명의 집에 가자고 돌았던 골목에서 우연히 두 소년공을 발견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봐, 산코(三公), 요시코(義公)" 하고 부르자, 둘은 변장한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돌아 다가왔다. 그리고 둘은 "미야모토(宮本) 리헤이다!" 하고 냉담하게 지껄이고는, 발걸음을 돌려 후다닥하고 도망쳐 버렸다. 놈들은 망을 보고 있던 것이다. 건방지게 "미야모토다." 라니, 평소에 부모보다 두려워하고 또 존경하는 자신에게 냉담하게 지껄였을 때도 저 눈이었다.

서둘러 트럭으로 회사 근처 길모퉁이에 왔을 때, 느닷없이 옆쪽에서 남자 오육 명이 운전석를 향해 달려들었다. 큰일 났다고 자세를 취하자 운전석 뒤 창문을 부수고 서서히 다가왔을 때 저 가와무라의 눈…….

"저 눈은, 부모고 은인이고 죽일 눈이야!!"

리헤이는 온몸을 쑥 지나가는 추위와도 같은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봐, 준비 해. 오늘 안에, 이사하자고."

벌벌 떠는 마누라에게 이렇게 말한 리헤이는 조금 전까지 넘치던 자신이 모두 없어져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1. 집에서 먹이고 재우며 키우는 제자 [본문으로]
posted by 일각여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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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7. 20:00 일본문학

茶漬三略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1562/files/52453_499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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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키 마고헤이지(柾木孫平治) 비망록


사람들은 당시의 쇼군이었던 태합(太閤)의 집안 내력을 알고 싶어했다.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筑前守秀吉)이었을 쯤부터는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작은 원숭이(小猿)나 히요시(日吉)라고 불리며 제대로 된 성(姓)마저 없었을 무렵의 내력을 알고 싶어했다.

하지만 태합은 자신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평생 다른 사람에게 말한 예가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구태어 묻는 이가 있으면,

「넓은 하늘(大空)에 집안 내력은 없다」

하고 더할 말이 없다는 얼굴을 했다.

또 그 위엄을 거스르면서까지 무례하게 묻는 이도 없었다.

어렴풋이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히쓰(祐筆)나 마쓰나가 데이토쿠(松永貞徳) 등도 부득이 내력을 언급할 때는,

히데요시 공(公) 가라사대,

[각주:1] 비슈[각주:2]의 민간에서 태어나서 풀 베는 법은 알았지만 붓 잡는 법 깨치지 못하고, 다만 우리 어머니는 대궐(内裏) 수라간(御厨子所) 하녀이셨지만 어느날 밤 꿈에 수 천만의 오하라이바코(御祓箱)가 이세(伊勢)에서 하리마(播磨)를 향해 빈틈도 없이 하늘 위를 날아가는 것을 보고 내를 잉태하셨다――

하고 적고는 했다.

그런 것에서 히데요시의 모친이 모치하기(持萩) 쥬나곤(中納言)의 딸이었다든가, 그는 시골 출신의 쥬나곤이었던 야스히라(保広)의 서자(落胤)라든가, 오다(織田)가의 하급 무사(被官)의 아시가루(足軽)였다 귀농한 농민 야에몬(弥右衛門)의 자식이었다고 하는 게 진실인가, 소문이나 험담도 가지각색이었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태합은 어떤 것이 진짜고 어떤 것이 틀린 것인지는 말한 예가 없다.

  1. 원문은 われ [본문으로]
  2. 오와리국(尾張国)의 별칭 [본문으로]
posted by 일각여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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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0. 16:02 일본문학

汚れつちまつた悲しみに……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0026/files/894_28272.html


더럽혀져 버린 슬픔에

오늘도 가랑눈이 내려앉는다.

더럽혀져 버린 슬픔에

오늘도 바람마저 세차게 분다.


더럽혀져 버린 슬픔은

마치 여우의 가죽옷

더럽혀져 버린 슬픔은

가랑눈에 덮여 움츠러든다


더럽혀져 버린 슬픔은

무엇하나 바라지 않고 원하지 않고

더럽혀져 버린 슬픔은

권태속에서 죽음을 꿈꾼다


더럽혀져 버린 슬픔에

애처롭게도 무서워져서

더럽혀져 버린 슬픔에

어찌할 도리도 없이 날은 저문다……

posted by 일각여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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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9. 22:23 일본문학

光と風と夢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0119/files/1743_145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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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5월 어느 늦은 밤, 35세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스는 남프랑스 예일의 객사에서 돌연 심한 각혈에 시달렸다. 급히 달려온 아내에게 그는 종이칼[각주:1]에 이렇게 적어 보여주었다.

「두려워할 것은 없소. 이게 죽음이라면 편한 것이니.」

그후 그는 요양지를 찾아 전전해야만 했다. 영국 남부의 휴양지 본머스에서 삼 년 있은 후, 콜로라도로 가보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대서양을 건넜다. 미국도 생각처럼 좋지 않아 이번에는 남태평양행을 해보기로 했다. 70톤의 스쿠너는 마르키즈, 투아모투, 타히티, 하와이, 길버트를 거쳐 일 년 반의 순항 끝에 1889년 말 사모아의 아피아 항에 닿았다. 해상 생활은 쾌적했고, 섬의 기후는 부족함이 없었다. 스스로 「기침과 뼈일 뿐이다」라던 스티븐스의 몸도 일단 소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살 마음이 들어, 아피아 시외에 사백 에이커 정도의 토지를 구입했다. 물론 여기서 일생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다음해 이월, 구입했던 토지의 개간이나 건축을 잠시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시드니까지 외출했다. 거기서 배편을 기다려 일단 영국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영국에 있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난 이제 한 번밖에 영국에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네. 그리고 그 한 번이란, 죽을 때겠지. 나는 열대에 있어야만 조금이나마 건강한 것 같네. 아열대인 이곳(뉴칼레도니아)에서도 나는 금방 감기에 걸리더군. 시드니에서는 결국 각혈까지 오고 말았지. 안개가 짙은 영국에 돌아가는 일 따윈 지금은 생각조차 하기 힘들어. ……난 슬픈 것일까? 영국에 있는 일고여덟명, 미국에 있는 한두명의 친구와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것, 그게 괴로울 뿐이지. 그걸 빼고는 오히려 사모아가 더 마음에 든다네. 바다와 섬의 원주민들, 섬 생활과 기후가 나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겠지. 나는 이 유형(流刑)을 절대로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네.」

그해 십일월, 그는 겨우 건강을 되찾아 사모아로 돌아왔다. 그의 매입지에는 원주민 목수가 만든 작은 오두막집이 세워져 있었다. 본건축은 백인 목수가 아니면 할 수 없다. 그게 완성될 때까지 스티븐스와 그의 아내 패니는 오두막집에서 먹고 자면서 스스로 원주민들의 감독을 맡아 개간에 돌입했다. 그곳은 아피아 시에서 남쪽으로 삼 마일 떨어진 휴화산 바에아의 산중턱으로, 다섯 개의 시냇물과 세 개의 폭포, 그외 몇 개의 협곡과 벼랑을 포함한 육백 미터에서 천삼백 미터에 이르는 높이의 대지(台地)였다. 원주민들은 이 땅을 바이리아라고 불렀다. 다섯 강이라는 뜻이다. 울창한 열대림과 묘망한 남태평양의 조망을 가진 이 땅에 자신의 힘으로 생활의 초석을 세워나가는 것은 스티븐스에게 있어서 어릴 적 모형 정원 놀이와 같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자기 손으로 자기 생활을 직접 유지함에 대한 의식(意識)――스스로 말뚝을 하나하나 박아넣은 그 땅 위의 집에 살면서, 스스로 톱을 들고 만드는 것을 도운 의자에 앉아, 스스로 괭이를 잡아 일군 밭에서 키운 야채와 과실을 얼마든지 먹는 것――유년 시절 처음 자력으로 만들어낸 수공품을 테이블 위에 놓고 관찰했을 때의 신선한 자존심을 되찾아 주었다. 이 오두막집을 구성하고 있는 통나무와 판자, 하루하루의 음식물까지 모두 그 내력을 알고 있다는 것――요컨대, 저 나무들은 전부 자신의 산에서 베어져 자신의 눈앞에서 대패질한 물건이고, 저 음식물의 출처도 전부 확실히 파악하고 있다는(이 오렌지는 어떤 나무에서 딴 거고, 이 바나나는 어떤 밭에서 나왔다는) 것. 이것도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든 요리가 아니면 안심하고 먹을 수 없었던 스티븐스에게, 어딘가 안심을 갖게 해주었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 또는 월터 휘트만의 생활을 실현하고 있었다. 「태양과 대지와 생물을 사랑하고, 부를 경멸하며, 원하는 자에게 내려주는 백인문명과 닮았다고 하는 커다란 편견과 가정. 교육받지 못하고[각주:2] 힘이 넘치는 사람들과 함께 활보하고, 밝은 바람과 빛 속에서 힘든 노동을 한 피부 밑에서 피가 도는 것을 기분좋게 느끼며, 사람들에게 비웃음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잊고는 정말이라 생각하는 것만 말하고 정말로 원하는 것만 행한다.」 이것이 그의 새로운 생활이었다.


  1. 원문은 紙切り로 切り紙에 자른 종이쪼가리라는 뜻이 있어 切り紙의 오기가 아닐까 의심됨. [본문으로]
  2. 教育なき [본문으로]
posted by 일각여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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