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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여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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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7. 20:00 일본문학

茶漬三略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1562/files/52453_499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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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키 마고헤이지(柾木孫平治) 비망록


사람들은 당시의 쇼군이었던 태합(太閤)의 집안 내력을 알고 싶어했다.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筑前守秀吉)이었을 쯤부터는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작은 원숭이(小猿)나 히요시(日吉)라고 불리며 제대로 된 성(姓)마저 없었을 무렵의 내력을 알고 싶어했다.

하지만 태합은 자신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평생 다른 사람에게 말한 예가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구태어 묻는 이가 있으면,

「넓은 하늘(大空)에 집안 내력은 없다」

하고 더할 말이 없다는 얼굴을 했다.

또 그 위엄을 거스르면서까지 무례하게 묻는 이도 없었다.

어렴풋이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히쓰(祐筆)나 마쓰나가 데이토쿠(松永貞徳) 등도 부득이 내력을 언급할 때는,

히데요시 공(公) 가라사대,

[각주:1] 비슈[각주:2]의 민간에서 태어나서 풀 베는 법은 알았지만 붓 잡는 법 깨치지 못하고, 다만 우리 어머니는 대궐(内裏) 수라간(御厨子所) 하녀이셨지만 어느날 밤 꿈에 수 천만의 오하라이바코(御祓箱)가 이세(伊勢)에서 하리마(播磨)를 향해 빈틈도 없이 하늘 위를 날아가는 것을 보고 내를 잉태하셨다――

하고 적고는 했다.

그런 것에서 히데요시의 모친이 모치하기(持萩) 쥬나곤(中納言)의 딸이었다든가, 그는 시골 출신의 쥬나곤이었던 야스히라(保広)의 서자(落胤)라든가, 오다(織田)가의 하급 무사(被官)의 아시가루(足軽)였다 귀농한 농민 야에몬(弥右衛門)의 자식이었다고 하는 게 진실인가, 소문이나 험담도 가지각색이었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태합은 어떤 것이 진짜고 어떤 것이 틀린 것인지는 말한 예가 없다.

  1. 원문은 われ [본문으로]
  2. 오와리국(尾張国)의 별칭 [본문으로]
posted by 일각여삼추
2013. 12. 23. 19:52 일본수필

俗即菩提[각주:1]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1562/files/55098_506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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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가지고 버리러 가는 군중이 왜 저렇게 유쾌한 것 같은 얼굴로 모여있는 것일까. 가끔씩 문득 그날 아침의 엄청난 발걸음을 신기하게 쳐다볼 때가 있다.

경마는 인간의 강한 욕망 중 하나를 제도(済度)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다.

경마장에 모일 정도의 사람이면 원래부터 현인군자가 아니다. 이욕이 왕성하다면, 금전에는 배로 탐욕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사실 보고 있자면 지폐의 홍수 속에서 혈안이 된 얼굴이 무수히 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버스를 같이 타는 사람들을 봐도 그날 아침 경마장에서의 정신없는 모습은 다들 마치 어린애 같은 치기로 돌아가 있다. 아무리 욕심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예외없이 소년시절의 소풍 기분을 내며 나간다.

또 경마장 안에서는 의외로 소매치기나 강탈이 적다. 국전 같은 곳과 비교하면 예상외로 그런 피해는 없다. 생각하건대 소매치기도 그 정신없는 시장바닥에 휩쓸려 단순히 사람들 주머니에 있는 물건을 자신의 주머니로 이전시키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어지는 것이 틀림없다. 소매치기도 마권을 사고, 적중하는 환희를 매표소에서 맛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경마의 진미를 모르는 사람이 그 혼잡함과 혈안만 냉안시하고 한심하게 속된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 안에 있는 것이야말로 훨씬 한심하고, 더 속된 것이다.

  1. 속된 것에 깨달음(=보리)가 있다는 뜻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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黒船来航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1263/files/50362_390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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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제패의 발판


아편전쟁(1840-42)으로 중국이 개국한 뒤 극동의 일각 일본을 열면 이것으로 구 문명국을 자본주의 세계에 개방하는 사업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경 조약에서, 이 다음은 일본의 차례라고 하는 것은 영국을 선두로 하는 자본주의열강의 상식이었을뿐만 아니라, 일본에게 있어서도 상식이었다. 게다가 그 객이 어떤 객인지는 인도나 중국을 개국시킨 실적으로 비추어 볼 때 일본의 애국자에게는 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야시 시헤이가 『해국병담(海国兵談)』을 내었고, 하시모토 사나이는 일본이 「제2의 인도가 되는」것을 두려워 했다.

당시의 자본주의는 무역제일주의를 신봉하는 자유경제의 전성기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청년시대였지만, 인도나 중국에 대한 식민지화 전쟁, 그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불평등조약과 그 불평등조약으로 보장받은 부당한 이윤으로 선진국의 지위를 지켜왔던 것이었다.

문제는 어째서 미국이 일본개국의 선수를 쳤는가에 있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중국무역에서 영국에게 이기기 위한 발판으로써 일본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흥국 미국은 중국무역 방면에서도 쭉쭉 영국과의 차이를 좁히고자 했다. 1848년은 부르조아 혁명의 파도가 서구를 뒤덮은 해로, 산업혁명으로 인한 증기선이 실용화되고 철도가 실용화된 시대였다. 페리는 세계에서 앞장선 최신 기술을 가지고, 종래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미국해군을 증기해군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에서 증기선 항로로 중국에 가면, 중국무역으로 영국에게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당시의 유치한 기술로는 어떻게 해서든 도중에 석탄을 실을 기항지가 필요했다. 즉 이전에 말했다시피 중국무역에서 미국이 영국에게 이기기 위한 발판으로써 일본을 개국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페리는 제일 먼저 오키나와로 가, 나하(那覇)를 근거지로 삼아 오가사와라 제도로 이동, 지치지마 섬에 석탄 창고를 세울 토지까지 구입하고, 일본이 개국하지 않을 경우에는 지치지마 섬 혹은 나하를 기항지로 삼아 상하이무역을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 다음 태평양 전쟁에서, 처음으로 나하를 함락시키고, 다음에는 일본 본토를 향하게 된 것과 꼭 같은 일이다.


개국파와 양이파


태평한 잠을 깨게 한 쿠로후네의 내항은 국내 개국파와 양이파의 항쟁으로 되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개국파, 양이파라고는 하지만, 각각 두 종류가 있었다.

개국파의 일방에는 이이 다이로[각주:1]의 일파가 있었다. 마음속으로 개국하면 자신들의 오랜 권력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 그 권세를 이어나가기 위한 개국파였다. 또 하나는 순수한 개국파로, 시간순으로 안도 쇼세키, 사토 노부히로부터, 와타나베 가잔, 타카노 쵸에이를 거쳐, 페리 내항 당시에는 사쿠마 쇼잔, 하시모토 사나이 등이 그 대표자였다. 이 사람들은 세계의 진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한, 우국충정에서 개국을 주장한 애국파였다. 그래서 당시의 권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은 것이다.

양이파에도 비슷하게 봉건지배층인 양이와 인민의 양이 두 파가 있었다. 전자의 예는 나마무기에서 사츠마 무사들이 영국인을 벤, 이른바 나마무기 사건으로 대표되고, 후자는 이를테면 쓰시마가 점령당했을 때 최후까지 반항했던 쓰시마의 주민이었다. 민간으로부터 양이에 참가한 기슈의 하마구치 고료, 오와리의 하야시 긴베, 또는 덴구당으로 급히 달려가려 했던 고노 히로나카, 그 밖에도 문구[각주:2]동안 과격양이결행파 중에 여럿 있었다. 무사가 아닌 당시의 인민의 생산력을 대표하는 젊은 부르조아 양이가 후자를 대표한다. 이 네 파가 맹렬히 싸우면서 메이지 유신으로 역사는 흘러간다.


오랜 야망


일본개국으로 선수를 친 미국이 그 직후 일어난 남북전쟁으로 손이 묶여있는 동안 일본무역의 과실은 영국의 손으로 다시 넘어갔다. 이윽고 일본에도 메이지 유신의 개혁이, 프랑스의 지원를 받은 막부와 영국의 지원을 받은 천황의 양파의, 양쪽 모두 봉건적인 동일계급끼리의 권력쟁탈전이란 형태로, 혁명이 아닌 일종의 개혁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을 안내역으로 삼아 아시아 진출의 야망을 이룩하고자 했다. 그 첫 발로가 그랜트 장군의 유구 문제 알선으로, 대만정벌 이래 반목하고 있던 일본과 중국 사이의 중재역을 맡아 등장했다. 뒤이어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을 안내역 삼아 영국과 대항했다. 이 영미의 대립경쟁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무쓰 무네미쓰의 외교가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성공시킨 비밀이 있다.

포츠머스에서 미국이 러일전쟁의 중재역을 자청하고 나선 것도, 페리 내항 이래 일관되게 진행시켜온 「일본을 발판으로 아시아 진출」이란 오랜 야망을 이루기 위한 계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2의 개국


백년의 계책을 백년째에 정확히 실현했다고 할까. 그것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이고, 일미안전보장조약이며, 지금 다시 비준되려고 하는 일미통상항해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백년전 쿠로후네가 왔을 때, 우리의 선조는 직관적으로 조국의 독립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존왕과 결부되어 비뚤어진 모양으로 표현되었지만, 그것은 반식민지화의 위험에 대항한 애국의 본능이었다. 지금 백년후의「제2개국」을 맞아, 일부의 지사가 아닌, 일본국민 최대다수 계급인 노동자, 농민, 민족자본가, 지식인이 백년전의 근심과 분노를 백배로 늘려도 부족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 이이 나오스케(1815-1860). 오미 히코네번의 제15대 번주 [본문으로]
  2. 일본의 원호. 메이지 전 1861-1863년을 가리킴 [본문으로]
posted by 일각여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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