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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여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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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0. 19:35 일본수필

文章と言葉と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0879/files/3755_273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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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나한테 「문장을 너무 고른다. 그렇게 고르지 마라.」고 하는 친구가 있다. 나는 특별히 필요 이상으로 문장을 고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장은 무엇보다 명료하게 쓰고 싶다.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분명하게 문장으로 나타내고 싶다. 나는 단지 그것에 주의할뿐이다. 그렇게만 해도 펜을 쥐어보면 그다지 술술 써지는 일은 없다. 항상 너저분한 문장을 쓰고 있다. 나의 문장상 고심이라고 하는 것은 (만약 고심이라고 할 게 있다면) 그것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타인의 문장을 대할 때에도 내 자신의 문장을 대하는 것과 같다. 명료하지 않은 문장에서는 아무런 감동도 느낄 수 없다. 적어도 좋아할 수가 없다. 즉 나는 문장에 관해서는 아폴로주의를 신봉한다.

나는 남들이 뭐라 하든 방해석과 같이 명료한, 애매함을 용납하지 않는 문장을 쓰고 싶다.



오십년전의 일본인이 「신(神)」이라고 하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 머리카락을 흉하게 묶고, 목 주위에 곡옥을 건 남녀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일본인은, 적어도 오늘의 청년은 대부분 긴 턱수염을 기른 서양인을 떠올릴 것이다. 단어는 똑같이「신(神)」이지만 마음에 떠오르는 모습은 이정도로 변천되어 있다.

나는 언젠가 고미야 씨[각주:1]와 바쇼[각주:2]의 하이쿠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시키 코지[각주:3]의 해석에 따르면, 이 구는 해학을 담은 것이다. 나도 그 설에 이의는 없다. 하지만 고미야 씨는 어떻게든 장엄한 구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림의 힘은 오백년, 글의 힘은 팔백년을 간다. 문장의 힘은 몇백년이나 가는 것일까?


  1. 고미야 토요타카(小宮豊隆 1884-1966) : 일본의 독문학자, 문예평론가, 연극평론가, 일본학사원 회원. [본문으로]
  2.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64-1694) : 일본의 하이쿠 시인 [본문으로]
  3. 마츠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 : 일본의 하이쿠 시인, 국어학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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汚れつちまつた悲しみに……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0026/files/894_28272.html


더럽혀져 버린 슬픔에

오늘도 가랑눈이 내려앉는다.

더럽혀져 버린 슬픔에

오늘도 바람마저 세차게 분다.


더럽혀져 버린 슬픔은

마치 여우의 가죽옷

더럽혀져 버린 슬픔은

가랑눈에 덮여 움츠러든다


더럽혀져 버린 슬픔은

무엇하나 바라지 않고 원하지 않고

더럽혀져 버린 슬픔은

권태속에서 죽음을 꿈꾼다


더럽혀져 버린 슬픔에

애처롭게도 무서워져서

더럽혀져 버린 슬픔에

어찌할 도리도 없이 날은 저문다……

posted by 일각여삼추
2013. 12. 19. 22:23 일본문학

光と風と夢

원문출처 : http://www.aozora.gr.jp/cards/000119/files/1743_145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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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5월 어느 늦은 밤, 35세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스는 남프랑스 예일의 객사에서 돌연 심한 각혈에 시달렸다. 급히 달려온 아내에게 그는 종이칼[각주:1]에 이렇게 적어 보여주었다.

「두려워할 것은 없소. 이게 죽음이라면 편한 것이니.」

그후 그는 요양지를 찾아 전전해야만 했다. 영국 남부의 휴양지 본머스에서 삼 년 있은 후, 콜로라도로 가보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대서양을 건넜다. 미국도 생각처럼 좋지 않아 이번에는 남태평양행을 해보기로 했다. 70톤의 스쿠너는 마르키즈, 투아모투, 타히티, 하와이, 길버트를 거쳐 일 년 반의 순항 끝에 1889년 말 사모아의 아피아 항에 닿았다. 해상 생활은 쾌적했고, 섬의 기후는 부족함이 없었다. 스스로 「기침과 뼈일 뿐이다」라던 스티븐스의 몸도 일단 소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살 마음이 들어, 아피아 시외에 사백 에이커 정도의 토지를 구입했다. 물론 여기서 일생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다음해 이월, 구입했던 토지의 개간이나 건축을 잠시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시드니까지 외출했다. 거기서 배편을 기다려 일단 영국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영국에 있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난 이제 한 번밖에 영국에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네. 그리고 그 한 번이란, 죽을 때겠지. 나는 열대에 있어야만 조금이나마 건강한 것 같네. 아열대인 이곳(뉴칼레도니아)에서도 나는 금방 감기에 걸리더군. 시드니에서는 결국 각혈까지 오고 말았지. 안개가 짙은 영국에 돌아가는 일 따윈 지금은 생각조차 하기 힘들어. ……난 슬픈 것일까? 영국에 있는 일고여덟명, 미국에 있는 한두명의 친구와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것, 그게 괴로울 뿐이지. 그걸 빼고는 오히려 사모아가 더 마음에 든다네. 바다와 섬의 원주민들, 섬 생활과 기후가 나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겠지. 나는 이 유형(流刑)을 절대로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네.」

그해 십일월, 그는 겨우 건강을 되찾아 사모아로 돌아왔다. 그의 매입지에는 원주민 목수가 만든 작은 오두막집이 세워져 있었다. 본건축은 백인 목수가 아니면 할 수 없다. 그게 완성될 때까지 스티븐스와 그의 아내 패니는 오두막집에서 먹고 자면서 스스로 원주민들의 감독을 맡아 개간에 돌입했다. 그곳은 아피아 시에서 남쪽으로 삼 마일 떨어진 휴화산 바에아의 산중턱으로, 다섯 개의 시냇물과 세 개의 폭포, 그외 몇 개의 협곡과 벼랑을 포함한 육백 미터에서 천삼백 미터에 이르는 높이의 대지(台地)였다. 원주민들은 이 땅을 바이리아라고 불렀다. 다섯 강이라는 뜻이다. 울창한 열대림과 묘망한 남태평양의 조망을 가진 이 땅에 자신의 힘으로 생활의 초석을 세워나가는 것은 스티븐스에게 있어서 어릴 적 모형 정원 놀이와 같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자기 손으로 자기 생활을 직접 유지함에 대한 의식(意識)――스스로 말뚝을 하나하나 박아넣은 그 땅 위의 집에 살면서, 스스로 톱을 들고 만드는 것을 도운 의자에 앉아, 스스로 괭이를 잡아 일군 밭에서 키운 야채와 과실을 얼마든지 먹는 것――유년 시절 처음 자력으로 만들어낸 수공품을 테이블 위에 놓고 관찰했을 때의 신선한 자존심을 되찾아 주었다. 이 오두막집을 구성하고 있는 통나무와 판자, 하루하루의 음식물까지 모두 그 내력을 알고 있다는 것――요컨대, 저 나무들은 전부 자신의 산에서 베어져 자신의 눈앞에서 대패질한 물건이고, 저 음식물의 출처도 전부 확실히 파악하고 있다는(이 오렌지는 어떤 나무에서 딴 거고, 이 바나나는 어떤 밭에서 나왔다는) 것. 이것도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든 요리가 아니면 안심하고 먹을 수 없었던 스티븐스에게, 어딘가 안심을 갖게 해주었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 또는 월터 휘트만의 생활을 실현하고 있었다. 「태양과 대지와 생물을 사랑하고, 부를 경멸하며, 원하는 자에게 내려주는 백인문명과 닮았다고 하는 커다란 편견과 가정. 교육받지 못하고[각주:2] 힘이 넘치는 사람들과 함께 활보하고, 밝은 바람과 빛 속에서 힘든 노동을 한 피부 밑에서 피가 도는 것을 기분좋게 느끼며, 사람들에게 비웃음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잊고는 정말이라 생각하는 것만 말하고 정말로 원하는 것만 행한다.」 이것이 그의 새로운 생활이었다.


  1. 원문은 紙切り로 切り紙에 자른 종이쪼가리라는 뜻이 있어 切り紙의 오기가 아닐까 의심됨. [본문으로]
  2. 教育なき [본문으로]
posted by 일각여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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